고음영역을 능숙하게 처리하지 않고서는 노래를 훌륭하게 부르기 어렵다. 가수인지 백댄서인지 구분이 모호한 댄스가수들이 불러대는 곡들의 특색은 고음영역이 극도로 적거나 아예 빠져있다는 점이다. 저음만 들어 보시라. 이미자와 채연이 난형난제고, 패티 김과 현영이 막상막하다. 고음을 소화할 능력이 부족하다면 뮤지션이 아니라 엔터테이너로 만족하시라.
음악의 고음은 사람들에게 쾌락을 선사하지만, 정치의 고성은 국민을 피곤하게 만든다. 하지만 정치의 고성은 필요악이다. 정치는 충돌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일을 본업으로 삼는다. 고성이 사라진 정치는 고음이 결여된 음악처럼 생명력과 호소력이 떨어진다. 기성언론은 정치혐오를 부추기는 방편의 일환으로 목소리 큰 인간이 이기는 풍토를 개탄하곤 한다. 입체감 없는 평면적 분석일 뿐이다. 목청 크다고 나쁜 건 아니다. 알맹이가 없으니 탈이지.
점수에 살고 점수에 죽는 존재가 대한민국 국민이다. 누구나 공통적으로 노래방에서 점수가 잘 나오기를 바란다. 허나 점수 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흥겨운 기분을 이어가야 하는 점이다. 고음 불가의 음치수준이면 좀 어떤가. 재밌으면 그만이지. 노래방에서는 고음을 자주 부르는 손님이 왕이다. 가요계에서도 고음을 매끄럽게 잘 부르는 가수가 진정한 실력파로 통한다.
유능한 행정 관료로서 명성을 쌓으면 정치적 자산을 축적하는 계기는 된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을 걸으면 대부분 고음 불가의 상태에 빠진다. 갈등이 난무하는 고음의 영역은 정치가의 몫이다. 규정된 절차에 준거해 결재도장을 찍는 저음의 세계는 행정 관료의 관할구역이다.
이제껏 행정 관료로서 날계란을 먹으며 가창력을 길렀다 하여도 저음에 한정해 검증되었을 뿐이다. 저음의 정치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스피커의 정치일 뿐이다. 국민과 주민들은 저음의 정치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정말 짜증날 정도로 피곤함을 느낀다.
저음, 중음, 그 상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은 선거철이 돌아오면 정당을 향해 이 당, 저 당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기회포착에 열을 올린다. 때로는 이삭줍기도 시도한다. 정치공학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선거와 일정한 거리를 둬야 한다.
자신의 정치적 진로에 대한 명쾌한 입장표명을 유보하고 관망 자세를 유지함으로써 적들의 숫자를 최소화 하는 센스, 득음의 경지에 도달한 위대한 리더십은 고음과 중음과 저음의 완벽한 조화로 구현되기 마련이다. 중요한 고비에서 완숙한 고음을 과시해 대중의 인식에 강력하고 강렬한 임팩트를 각인시킬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한다. 낭랑한 미성이든 허스키한 음색이든 고음을 선도적으로 발성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건너가기 때문에 지도자가 아니다. 남들이 앞서 도강하게끔 자신이 교량이 되어야 진정한 지도자다. 그래서 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은 다리가 되어야 한다.
[시론] 지도자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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