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청와대의 국민청원제 ‘우려’- 박혁종 본지 논설위원

청와대가 2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청원한 ‘낙태죄 폐지’ 문제에 대해 공식 답변을 내놓으면서 정부 차원에서 내년에 8년 만에 임신 중절 실태 조사를 재개해 공론화에 나서고 제도 개선을 검토 하겠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태아 생명권이 매우 소중하지만 처벌 강화 위주 정책으로 인해 불법시술 등 부작용이 계속되고 있다고 임신중절의 문제점을 지적 하면서 ‘낙태를 하면 1년 이하 징역 또는 벌금 200만 원 이하’인 현행법도 여성에게만 책임을 묻고 국가와 남성은 빠져있다며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때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지난 2010년 이후 중단된 임신중절 실태조사를 내년에 재개해 현황과 사유 파악에 나설 것으로 보이며, 또 현재 진행 중인 낙태죄 위헌 법률 심판으로 공론화 계기가 마련될 것 같다. 낙태죄 폐지 청원은 지난 9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게시된 이후 한 달 만에 23만 5천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청와대가 이에 공식 답변한 것이다.
이와 함께 청와대는 JSA 북한군 귀순으로 공론화돼 역시 20만 명 이상 청원이 올라온 권역외상센터 지원에 대해서도 답변을 준비하고 있다. 2012년 대통령이 대선 때, “대의민주주의가 국민과 동떨어지고 있어 직접민주주의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문재인 후보가 아니라 경쟁자인 무소속 안철수 후보였다. 안철수 후보는 직접민주주의 강화를 단일화의 3대 조건 중 하나로 제시했다. 이에 대해 당시 문재인 후보와 민주당 측은 “예산과 정책, 법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당 없이는 민주주의 정치를 하지 못 한다”(이해찬 민주당 대표), “문 후보는 정당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안정된 국정운영이 가능하고 정당책임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안 후보와 차별화된다”(오영식 전략홍보본부장) 등 정당 중심의 대의정치론으로 안 후보를 비판했다. 2012년의 문재인 후보는 책임정당에 기초한 대의민주주의자였다.
그런데 지금 대통령이 되어서는 “국민은 간접민주주의에 만족하지 못한다”며 “국민은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의 직접민주주의가 ‘행태’ 수준이었다면, 문 대통령은 대의정치를 간접체제라고 규정하고 직접민주주의를 명시적으로 불러들였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의 직접민주주의 발언에 대해 대통령의 강한 소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20만 명 이상이 청원하면 나머지 국민의 의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최장집 명예교수는 지난 23일 고려대에서 열린 강의에서 직접민주주의 요소의 부작용으로 청와대 국민청원제도를 들며 “‘소년범을 무겁게 처벌하라’ ‘여성도 군대 보내라’ 등 깊은 논의가 필요한 이슈를 즉흥적으로 요구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며 “(이는 여론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가 차분한 숙의 과정을 건너뛰게 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직접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의 보완재에 그쳐야지 대안 체제가 돼선 안 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또 자유한국당 류 최고위원은 이날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청와대가 적극 시행중인 국민청원제가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다”며 “갈등을 조장하거나 편향적인 청원도 적지 않고 삼권분립의 취지에 반해 입법권을 침해한다는 지적이 있다”고 운을 뗐다.
그는 이어 “지난 16일 게시된 ‘군내 위안부 재창설’ 청원이 대표적으로 논란 끝에 삭제됐다. 국민청원 1호 답변을 이끌어 낸 ‘소년법 개정’ 청원도 30만 명 가까이 동의했으나 이는 헌법적 가치나 국제규범에 어긋나는 청원이라는 지적이 있었다”고 사례를 들었다.
위정자 앞에 아첨꾼들이 들끓으면 정치는 망하게 되어 있다. 이승만·박근혜 전 대통령은 부정 선거와 국정농단으로 하야와 파면되기 전까지 주변의 아첨꾼들이 자신을 악으로 인도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것이 이승만·박근혜 대통령의 면죄부가 될 근거는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위정자는 듣기 싫은 말로 자신에게 간쟁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을 더 가까이 두고 정사를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 정약용의 이론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들이 속는 셈치고 정약용이 체험으로 터득한 지혜를 믿고 아첨자들을 멀리하고 간쟁자를 가까이 두길 바란다면 너무 과한 욕심일까? 촛불 혁명으로 당선된 정부인만큼 나와 생각이 다른 국민들의 의견도 귀 기우려야 하지 않을까?
신중하게 한 발 한 발 나아가더라도 정상에 오르는 것은 몹시 어려운데, 그나마 정상 근처까지 도달했을지라도 어느 한 순간의 방심으로 천 길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을 보면서, 우리네 정치란 항상 살얼음 밟듯이, 깊은 연못가에 서 있듯이, 늘 조심스러운 마음을 지니고 있어 염려스러운 필자의 마음을 전해 본다.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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