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외래어 많이 써야 대접받는 세상

우리 국민 중에는 외국의 문물을 무분별하게 선호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단순한 선호차원이 아니라 무차별 수용으로 국적이 어디인지 모를 정도인 사람도 있다.
외래어에 대한 선호는 특히 심해 사용하는 말이나 글의 반 이상을 외래어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이렇게 외래어를 많이 사용해야만 유식하고 세련되며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라고 믿는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의 정신상태이다.
이런 사람들은 ‘회의’나 ‘모임’에서 ‘토론’이나 ‘얘기’로 이끌어낸 결론 보다는 ‘미팅’이나 ‘워크숍’에서 ‘브리핑’과 ‘디스커션’을 통해 얻어낸 결론이 더 훌륭하다고 믿는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주택형태도 ‘연립주택’ 보다는 같은 값이면 ‘빌라’나 ‘하이츠’를 더 좋아하며, 음식도 ‘식당’보다는 ‘가든’, ‘레스토랑’에서 먹는 것이 더 맛있고 영양가가 높다고 생각한다.
가게 이름도 예외는 아니어서 ‘의상실’ ‘양복점’으로 불리던 맞춤옷집도 ‘라사’에서 한동안 기능올림픽의 영향으로 ‘금메달의 집’ ‘기능사의 집’으로 변하더니 지금은 ‘테일러’요 ‘브띠끄’ ‘살롱’ 드레스 숍‘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외래어 선호풍조는 무분별한 수용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우리말 멸시로까지 이어진다. ‘네다바이’ ‘쓰리’로 불리던 범죄용어가 언제부터인가 ‘소매치기’ ‘들치기’ 날치기‘ ’퍽치기‘ 등으로 아름답게(?) 개명되는 바람에 ’자치기‘ 엿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등 어렸을 적에 즐기던 놀이의 ‘~치기’가 위험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정신이 외국말(문화)에 잠식되어 가고 있는 것이며, 또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무작정 외래어라면 통하는 줄 아는 사람과 또 그것이 무조건 옳고 유식하다고 받아들이는 그릇된 풍조다.
일전에 어느 사회단체에서 재일동포 지문날인 문제와 일본문화의 무분별한 수용을 걱정하는 일련의 캠페인을 벌여 국민적 호응을 얻었다. 그런데 캠페인이 끝나고 벌인 뒤풀이에서 그 사람들이 일본 노래를 한곡이라도 더 부르려고 앞 다툼을 했다는 소문이 있어 분보한 적이 있다. 한 저명인사가 공식석상에서 ‘루즈(loose)하다’는 말을 혀가 짧은 탓으로 ‘누수(漏水)하다’로 연속 발음해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언젠가 의상실을 개업하는 후배가 찾아와 가게 이름을 부탁하기에 고심 끝에 -내가 보기에도 너무나 잘 지은- ‘美’자와 ‘나’를 뜻하는 ‘미랑나’로 지어준 적이 있다. 그러나 한참 지난 뒤 명동에 차린 가게를 찾아갔더니, 그 집 간판에는 커다랗게 ‘Beauty & I’가 쓰여 있고 귀퉁이 전화번호 옆에 조그마한 글씨의 ’미랑나‘가 보여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우리는 중국 사람들이 ‘코카콜라’를 ‘가구가락(可口可樂)’으로 표기하는 자존심의 발로를 :역시 대단한 나라다“라며 우리 국민의 근성부족을 술안주 삼아 개탄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도 하면 된다. 외래문화와 문물의 범람만을 탓할게 아니라 말 하나 물건하나라도 새로운 것에는 적당한 우리말을 붙여서 사용한다면 나름대로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지 않겠는가. 여기에는 물론 언론을 비롯한 지식인들의 솔선하는 자세와 의식의 변화가 요구된다. 힘들고 어려운 말일수록 알기 쉽고 이해하기 편하게 아름다운 우리말로 바꿔주는 것이 소위 배운 사람들의 도리일 것이다.

< 저작권자 © 강원장애인복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