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시] 서리를 하다

이 영 춘

아이들은 초저녁부터 남의 집 담벼락 밑 옥수수 밭에 몸을 숨겼다
목소리도 죽이고 엉덩이도 낮춰 살금살금 숨어들었다
서걱대는 잎사귀들이 아이들 귓불을 당기기도 하였다
초저녁달은 빙그레 웃으며 아이들 엉덩이를 툭툭 치고 지나갔다
훔짓 놀란 아이들은 도둑고양이처럼 눈알을 굴리며 숨을 죽였다
이윽고 담장 안채와 사랑채에 불이 꺼졌다
1분, 2분, 3분, 4분, 5분—10분, 15분, 20분—

주인이 잠들기를 기다려다가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담을 타고 올라가 사과나무 가지를 휘어 당겼다
아이들 모두 주머니가 불룩해지자 누군가가 먼저 쏜살같이 밭고랑을 빠져 나간다
제일 어린 나도 이이들 꽁무니에 매달려 달린다
그러나 홱 잡아 채이는 내 옷자락!

박쥐같은 검은 손이 나를 끌고 간다
푹 얼굴을 숨긴 채 끌려간다
주인이 마당 한가운데 나를 내동댕이친다
박쥐손이 내 얼굴을 나꿔 뒤로 젖힌다
순간, 외삼촌이 내 얼굴을 보자 기겁을 한다
야, 요놈의 자식아, 외삼촌 보고 달라고 하지?
익지도 않은 사과를 뭣 하러 훔치러 왔냐?
외삼촌 목소리가 밤하늘을 흘러가는 달의 엉덩이처럼 허공에서 허허 웃고 있었다

**이영춘
* 1976년 『월간문학』등단
* 시집 : 『시시포스의 돌』 『시간의 옆구리』 『봉평 장날』
『노자의 무덤을 가다』 『따뜻한 편지』
* 시선집 : 『들풀』 『오줌발, 별꽃무늬』
* 번역시집 『해, 저 붉은 얼굴』 외 다수.
* 수상 : 윤동주문학상. 경희문학상. 고산문학대상.
한국여성문학상. 유심작품상특별상.
난설헌시문학상. 천상병귀천문학대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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