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시] 묵독

정하해

잘라낸 통배추 밑동에는 늙은 잎들만 남아
사람의 양로원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재잘거리던 언설言說들은 휴직을 하고 어디로 나갔는지

망치와 칼 없이도 저 들녘을 사수한 눈발은
알을 슬고, 새끼를 치고, 그들만의 폭격을 퍼 붓는다
사산된 바람은 모두 여기 있어
꽃이 벗어둔 이름들만 사산을 흔들었다
잠시 생의 주기인
너는 추풍령을 지나고 있다

창밖은 생략한 부분만 보이고
타인의 옆자리까지 수북이 쌓이는 이 계절 안쪽에 뜬
문자들은 낯설다

포탄이 터진 밤은 별 밭이라고 어릴 적 위문편지의 답은 그랬었지
깨알 같은 단어들로 수 없이 설레던 너여
막되 먹은 풀꽃의 시절이여
지금 들판을 질러오는 그때의 글자들에 가있다

계란 껍데기처럼 눈발은 뒤집힌 채 한 컷씩 왔다가 사라져
저렇게 표현해야 할 이유는 없는데
몇 장의 기억을 조용히 통과하는 동안, 온갖 종류의 풍경들이
이별한 뒤였다는 것이

* 정하해 시인
* 포항 출생, 2003년 『시안』등단
* 시집 : 『살꽃이 피다』 『깜빡』
『젖은 잎들을 내다버리는 시간』
『바닷가 오월』
* 2018년 대구시인협회상
* 한국시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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