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가산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소설 속 무대 평창 ‘봉평’
고원레저관광지로 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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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달은 부드러운 빛을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리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 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중략)/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지난해 가을, 원주시 명륜2동 주민센터와 주민자치위원회가 주관해 평창 봉평으로 야유회 겸 단합대회를 떠나는 버스 안에서 줄 곳 나는 40여년 전 떠나온 고향을 셀렘으로 그리고 있었다.
한반도의 척추, 포효하는 백두대간이 잠시 한숨을 돌리는 곳, 오대산 끝자락 차령산맥이 이제 막 기지개를 켜는 태고의 자연 속에 봉평은 그렇게 묻혀 있으리라….
그러나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장돌뱅이들이 숨을 몰아쉬며 넘나들던 장평-백옥포리 노루목재는 영동고속도로의 개통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지 오래고 고속도로 변에 자리하고 있던 이효석의 묘지마저 우여곡절 끝에 가족들에 의해 경기 파주로 옮겨간 지 십수년 째란다.
영동고속도로 인터체인지가 있는 장평에서 봉평까지 시오리길 중간쯤 평촌리에 이르자 ‘봉산서재’라는 현판의 조그마한 사당이 눈에 띈다.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이곳에서 이이선생을 잉태하였다고 하여 후학들이 사당을 짓고 매년 향리 유학자들과 평창군에서 주관해 제를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봉평면 초입 한 답 모퉁이를 돌아서자 상전벽해(桑田碧海).
봉평은 개발과 도시화의 물결을 비켜가지 못한 채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어 아쉬움을 더했다.
봉평에 이르자 불현듯 아스라이 잊혀져가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코흘리개 딱지를 떼고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려던 그해 겨울, 그날도 봉평은 메밀꽃 같은 흰 눈이 온통 지천으로 뒤덮여 있었다.
새벽녘, 천지를 진동하는 총소리에 놀라 마당으로 뛰쳐나왔을 때, 소용돌이치는 전쟁터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나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울진·삼척지구로 침투한 북한 무장공비들을 국군과 전투경찰이 소탕하는 전투였던 것이다.
아름다운 산하, 순수문학가가 자연을 노래하던 이 땅에 이데올로기의 제물이 되어 선혈을 뿌리며 죽어간 남북의 젊은이들을 후세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양철지붕 교사(校舍) 추녀에 고드름이 녹아내리던 중학교 입학식 날, 이 이데올로기 전쟁의 최대 민간인 피해자 이승권(개명 이학관)이 해맑은 모습으로 우리 앞줄에 서 있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다 무장공비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이승복의 형, 그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공비들에 의해 난자당한 이승권 친구의 온몸에 난 상처처럼 골 깊은 남과 북 이데올로기의 상처는 우리세대가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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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 전쟁 상처 아물지 못한 채……
메밀꽃 축제 등 이효석 문학 ‘열기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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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평창동계올림픽의 무대가 된 봉평은 대규모 고원레저 관광지로 탈바꿈한 지 오래다. 봉평면 무이리와 면온리 일대는 휘닉스파크 스키장과 콘도미니엄, 골프장 등이 건설돼 사시사철 전국에서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북적이고 있다. 이 때문에 봉평하면 메밀꽃이 떠오르던 이미지는, 빛바랜 소설책의 표지처럼 퇴색하고 있다면 성급한 표현일까?

아무튼 봉평의 산하에 메밀꽃이 지천으로 흐드러지게 피었던 메밀밭은, 관광객을 맞는 업소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서 축제용 일부를 제외하면 구경하기 힘든 실정이다.
그래도 구 중·고등학교 앞 가산공원과 바로 옆 흥정천 건너 재현한 물레방앗간은 일년 내내 가산 이효석의 문학을 사랑하는 문인들이 줄을 잇고 있다. 또 이효석 문학관이 건립돼 각종사료들이 모아져 봉평을 찾는 후학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어 다행이다.
아울러 봉평을 지키는 주민들이 뜻을 모아 효석백일장 등 축제를 열어 전국의 문학 동호인들이 찾아오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토속적인 한국의 농촌풍경을 한 점 연출 없이 표현했던 가산 이효석의 소설 속 무대 봉평은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농촌아낙의 앞치마만큼이나 얼룩진 광목휘장 밑에서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며 너스레를 떨던 장돌뱅이….
시골농부에게 있어 장날은, 얼큰한 막걸리 한 사발에 짚에 엮은 고등어 한손 지게에 매어달고 집으로 향하면 부러운 것 무엇이 있었을까.
시끌벅적 난장판 봉평 장날도 변해가는 세태의 바람을 이기지 못하는 듯 장날풍경은, 삼베적삼에 바람드나들 듯 휑한 을씨년스러움만 아스팔트 길바닥 골목을 휩쓸며 지나가고 있었다.
현대화의 물결 속에 변해가고 있는 오늘, 봉평의 모습을 가산 이효석이 보고, 소설을 다시 쓴다면 그는 어떤 메시지를 우리에게 남길지….
돌아오는 길,
하늘에는 물기 머금은 회색 구름만 태기산 고갯마루를 한가롭게 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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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장애인복지신문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