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딸 가진 아버지의 고백

박혁종 - 본지 논설위원
박혁종 – 본지 논설위원

필자에게 혼기를 앞둔 과년한 딸이 있다. 최근 직장 연수원에서 만나 마음 편안케 해주는 남자 친구가 있다고 해서 지난 주말에는 본의 반, 타의 반, 머무르지 않으려는 세상의 일정에 따라 그 미지의 친구를 잠시 만나서 저녁을 먹었다. 좋을 것도, 그렇다고 나쁜 것도 없었지만 어쨌든 딸 녀석의 눈치를 거절하기도 어려워 마지못해 자리를 빛내주게(?) 되었다.
만남의 장소에서 술 몇 잔을 마신 탓도 있겠지만 문득 “이제 내 딸이 시집 갈 나이를 먹었나 보다” 생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늙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염세적 적군이 엄습해 왔다.
또 한편으로는 딸 가진 부모인지라 남들이 보는 데에서는 남들의 눈을 의식하여 행실을 조심하겠지만,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부끄러운 행실을 하지는 않는지, 가슴에 와락 걱정이 앞선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남들이 어쩌다 보이는 곳에서도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나 않을지 옛 관습의 고리타분한 중년의 노파심에 근육이 경직 되는 것처럼 뻣뻣해진다. 또 남들로부터 당사자는 물론 가족 모두가 비난은 받지나 않을까? 딸을 둔 부모의 심정은 혼자 방 안에 있는 딸의 모습을 살펴볼 때, 으슥한 방구석에도 부끄럼이 없었으면 하는 시대착오적(?)인 바람이다.
하지만 ‘옷깃만 스쳐도 인연’ 이라고 했던가. 더구나 부부는 수백 생의 인연으로 ‘인’은 주관적 요인, ‘연’은 객관적 요인이 아니던가. 내가 인이요, 배우자가 연인데, 두 손바닥이 만나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인과 연이 함께 충실해야 과(果)가 충실할 것이 사실이지만. 필자의 생각은 튼실한 결과를 위해서는 둘 사이의 간격과 통로가 있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는 숲에 우거진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이 나무를 자라게 하듯이 남녀 사이 간격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다. 간격은 무엇이든 흐르게 하는 통로다. 바람이 흐르고 햇살이 흐르고 물이 흐르고 정이 흐르고 이야기가 흘러간다. 둘 사이 흐르는 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자라지 못한다. 반면 간격이 너무 벌어지면 기대지 못해 쓰러진다.
간격과 통로가 없는 사랑은 콩깍지가 씌어서 결혼한 것에 가까운 만큼 살다보니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상대방이 바뀐 게 아니라 내 관점이 바뀐 것이기 때문이다. 결혼 전에는 장점만 봤지만, 결혼 후에는 장점보다 단점만 보이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로의 간격을 두고 서로를 알아갔었더라면 서로를 대할 때 기쁨은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지혜롭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는 사랑과 애착이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으로 포장된 애착에 머물러 있다. 정신 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진정한 사랑은 하나가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는 상태여야 한다. 사랑은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면서 동시에 상대도 성장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행복해지려면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부터 키워야 한다”고 충고한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필요해서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정신의 응석일 뿐이다.
사랑에는 서로의 보호와 책임이 뒤따른다. 꽃을 아낀다고 하면서도 물을 주지 않는 사람이 과연 꽃을 사랑하는 것일까? 상대의 성장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이야말로 사랑의 필요충분조건이다. 결국 상대방을 구속하려 드는 것은 애착이요, 상대방이 굴레의 얽매임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 것이다.
이미 결혼을 한 기혼자들의 대다수는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한다. 이유를 들어 보면 “사람의 판단력이 떨어져 결혼하고, 인내력이 떨어져 이혼하며, 기억력이 떨어져 재혼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부부간의 관심이 아름다운 구속이라고 생각하지만 갈수록 불편한 족쇄로 여겨질 수도 있다. 수십 년간 다른 환경과 처지에서 살아온 남녀가 만나 함께 살아가면서 행복해질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다행이 어질고 착한 서로의 상대를 만나면 행복하겠지만 말이다. 결국 삶은 체험 학습장이요, 몸뚱이는 체험 학습 교재라고 생각한다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겠지만, 행복은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면 결혼은 해도 문제요 안 해도 문제인 것이다. 결혼은 서로에게 새장 같은 것이다.
안에 있는 새는 부질없이 나가려고 하고, 밖에 있는 새는 들어가려 애쓴다.
필자는 세상의 미혼 남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지금 서로 상대방과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이라면, 가던 길, 하던 일, 보는 것, 듣는 것, 하던 말을 잠시 멈추고 무엇이 잘못되지는 않았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말이다. 이는 과거의 후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동시에 자신의 소중한 시간과 정열을 현실과 미래에 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결혼을 당연시하는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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