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를 잃고 소리를 얻다. 횡성이 키운 소리꾼, 허정

하반신 마비 사고 후 판소리와 인연…제12회 횡성한우축제 공연

소리꾼-허정
소리꾼-허정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드라마를 쓴다. 지난 10월 18일, 횡성문화원에서 판소리를 배우고 있는 허정(53)씨를 만났다. 그 인생의 시작은 평범했다. 사고로 두 다리만 잃지 않았어도 그는 어쩌면 지극히 평범하게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는 가장으로, 평범한 남편, 평범한 아버지로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사고로 두 다리를 잃고 나서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생각지도 않은 사고로 평생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는 불편한 삶이 되었지만 그는 두 다리를 잃은 대신 평생 함께할 소리를 얻었다. 판소리는 그에게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준 스승이 되었다. 횡성이 키운 소리꾼 허정. 그가 써나가는 인생 2막의 드라마를 살짝 들여다보자.

사고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온다

멀쩡하던 그가 갑자기 장애인이 되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상상도 못했던 일이 어느 날 현실이 되어버린 그 황망함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사고가 일어난 날은 2006년 12월 15일. 당시 그는 횡성산림조합에 근무하면서 사방댐 건설, 간벌, 토목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해 여름 평창지역에 수해가 심해서 수해복구 지원으로 파견되어 일하고 있었다. 파견근무 마지막 날, 자재를 쌓던 굴삭기에서 떨어진 자재가 그의 허리를 덮쳤다. 흉추 10번. 하반신 마비. 청천벽력과도 같은 결과였다.
그 후 생활은 180도 바뀌게 되었다. 공근면 학담2리에서 3대가 같이 화목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졸지에 어린 자식은 부모님이 길러야 했고, 병상에 누워 암울한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내는 24시간 병상에 누워있는 자신을 돌봐야 했고,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믿기지 않고 억울해서 혼자 있는 시간엔 눈물도 많이 쏟았다.

휠체어를 타고 세상 밖으로 나오다

누구나 갑자기 장애인이 된다면 그걸 쉽게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개 이런 경우 처음에는 장애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 자신에게 이런 불행한 일이 생기냐며 분노하다가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 3년이 걸렸다.
다행히 우울증은 없었다. 매사에 긍정적인 성격 탓이었다. 혹시나 스스로 무너질까봐 걱정도 되었지만 아내의 지극정성과 어린 두 아이가 그를 잡아주었다. 하루 종일 병상에 있으면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잡념은 재활치료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언가 집중할 일을 찾다가 막연히 한자를 쓰기 시작했다. 중·고등학교 한자 참고서, 천자문을 보며 무작정 쓰고 또 썼다. 무슨 일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재활치료 3년을 마치고, 그는 두 다리가 아닌 휠체어를 타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음치, 판소리를 탐하다

휠체어를 탄 장애의 몸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앞으로 인생은 어떻게 변하게 될 것인가. 병원에서 나왔으니 뭐라도 하긴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음악을 따로 배워본 적은 없지만 민요나 배우러 갈까 하는 생각으로 장애인복지관을 1년 다니다가 민요보다는 판소리를 배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해서 횡성문화원을 찾았다가 지금의 스승 박양순 선생을 만났다. 박양순 선생은 국창 조상현 선생 판소리 이수자이자 사단법인 판소리전통진흥회 이사장으로 강원 최고 명창이기도 하다. 판소리 불모지나 다름없던 강원에 판소리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허씨는 음치다. 그는 판소리가 음치를 만나 고생하는 것이 불행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판소리를 만난 것이 행운으로 보였다. 음치인 그가 판소리를 배운다고 하니 처음엔 주변에서도 취미삼아 조금 하다 말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연습에 몰두했다. 산에 가서 연습하다가 산길에 차가 빠지기도 하고, 강에 가서 연습하다가 모래사장에 차가 빠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119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삼마치 고개 산에 가서도 혼자 연습하기도 하고, 횡성뿐만 아니라 인근 원주에까지 안다녀본 산, 강가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 피나는 연습 덕분에 지금은 판소리의 맛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극복하지 못할 고난은 없다. 열정만 있다면!

판소리를 배우는 일은 지난한 일이다.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어가며 천부적인 재능을 뽐내는 사람도 있지만, 허씨처럼 음악에 대해 전혀 문외한인 사람이 판소리를 배운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게다가 하반신을 못 쓰는 장애를 가지고 있고, 설상가상, 소리를 내지르며 하는 연습 때문인지 사고 후유증으로 약해진 고막까지 터져버렸다. 인공고막을 해 넣었는데 최근 그것마저 터지고, 나머지 한쪽 고막도 약해져 있어 스승의 소리를 듣고 배우는 일이 남보다 몇 배는 더 힘들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습을 한다. 매주 화, 목요일에는 횡성문화원에서, 다른 날은 스승의 강의가 있는 홍천, 춘천을 따라다니며 배우고, 개인사사까지 받고 있으니 소리를 배우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그의 일상은 오로지 판소리로 채워지고 있다. 재작년에는 ‘판소리교육지도자 1급’ 자격증도 땄다. 아직 스승에게 배울 일이 많지만 어느새 초보자를 가르칠 만한 실력 정도는 쌓아 놨다. 언젠가는 자신의 제자를 키우고 싶다고 하는데, 판소리를 더 널리 전파하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에서 오는 욕심으로 느껴졌다.

판소리 다섯마당 중 ‘흥보가’ 완창이 꿈

판소리는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이다. 한 사람의 소리꾼이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대여섯시간의 긴 이야기를 노래로 들려주는데, 세계 어디에도 이런 장대한 음악이 없다. 조선 중기까지 판소리 열두마당이 전해져왔으나 조선 후기에 하나씩 사라져 조선말기에 활동하던 명창을 마지막으로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긍가> <적벽가> 다섯마당만 남았다.
그가 배우고 있는 것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인데 세 가지를 한꺼번에 배우다보니 가끔 헷갈리기도 한다. 이중 <춘향가>와 <심청가>는 완창하는데 5시간 이상이 걸리고 <흥보가>은 그보다 훨씬 짧은 2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지난번 횡성한우축제 때 <흥보가>를 선보이기도 했는데, 흥을 한층 돋워야 하는 축제의 특성상 장시간이 소요되는 판소리를 완창 할 수는 없지만 판소리 한 대목 정도만 하고 나오는 것이 아쉽기는 하다고.
그가 판소리를 배운지 7년. 아직 완창을 하려면 멀었지만 앞으로 3년 정도 열심히 하면 <흥보가> 완창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횡성문화예술회관에서 <흥보가> 완창 발표회를 갖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그때가 되면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은 한규호 군수님이 축사를 해주실 거라는 ‘믿음’으로 벌써부터 은근한 압력을 넣는 분위기다.

소리꾼-허정
소리꾼-허정

‘내 인생의 청춘은 언제나 지금이다’

그는 2014년 남도민요 국악경창대회에서 신인부 장려상을 받고, 2015년 국악경창대회 판소리부문에서 신인부 대상을 받았다. 휠체어를 타고 판소리 공연을 하러 다니면서 서서히 유명세를 타게 되더니 이제는 신문, 방송에서도 그를 눈여겨보면서 수시로 ‘러브콜’을 보내기도 한다. 올해 SBS의 ‘세상에 이런 일이’, KBS ‘아침마당’ 등에서도 출연요청이 있었으나 모두 내년으로 미루었다. 내년 방송에 정식으로 출연하게 되면 당당하게 <횡성의 소리꾼>으로 자신을 소개할 것이라고 한다. 자신을 소리꾼으로 키워준 곳이 횡성이고, 횡성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입은 사람이기 때문이란다. 더 나아가 그는 2018년 평창동계패럴림픽 개회식에서 판소리 공연으로 전 세계에 우리의 소리와 횡성을 알리겠다는 꿈도 가지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장애인이 된 것은 그에게 분명 불행한 일이지만, 그는 자기에게 찾아온 불행으로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가는 계기로 삼았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고, 남보다 몇 배나 더 노력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는 의지와 열정으로 당당하게 이겨냈다.
추락하는 새에게는 날개가 있고, 절망의 늪에서도 희망의 꽃은 핀다. 그는 ‘인생의 청춘은 언제나 지금’이라는 것을 판소리로 증명해보이고 있다.

글/사진 이철영 strikaza@korea.kr
출처 : 횡성군청 섬강의 물소리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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