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한글날 맞는 우리말과 글의 ‘슬픈 자화상’

570돌 한글날(10월9일)이 지나고 있다. 거리에 나부끼는 태극기가 이날이 법정공휴일이며 기념일이라는 것을 알리는 유일한 수단인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게 되는 날이다.
강원도내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어디를 가나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연휴가 지나고 취재차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딱한 공사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갓길 공사 중인지 곳곳에 세워둔 간판에는 ‘길어깨 없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길어깨? ‘갓길’에 대한 웃지 못할 표현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말은 일본말 ‘로카타(路肩,ろかた, 한자어 노견)’에서 왔다. 일본국어대사전에 보면 ‘路肩 : 道路の有效幅員の外側の路面’이라 풀이하고 있다. 번역하면 ‘도로에 유효 폭원의 외측 노면’이다. 곧, 로카타(路肩)의 한자를 한국음으로 읽어 ‘노견’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원래 이것은 영어의 ‘road shoulder(로드 숄더)’에서 온 말로 일본사람들이 이를 직역해 ‘길어깨’를 뜻하는 한자말을 만드니, ‘노견(路肩)’이 그것이다. 이것을 한국인들이 들여다 줄곧 쓰다가 이제 겨우 ‘갓길’로 정착되었나 싶었는데…꼴불견이다.
‘제 것의 본디 뜻을 생각지 않고 무늬만 한글로 바꾸어 쓰는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인 듯 하여 못내 씁쓸하다.
리우올림픽 경기 때 경기 해설자가 우리 선수의 실수를 보고 “선수자신이 최고 잘하는 18번 기술을 써야지 다른 기술을 쓰다가 졌다”고 해설을 해 아연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얼마나 많은 일본 잔재가 없어지지 않고 남아 우리의 말과 글을 갉아먹는지….
그럼 18번은 무엇인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노래방에서 흔히 쓰는 “잘하는 18번 노래해봐요”는 일상이 된지 오래다.
이 말은 일본의 대중 연극인 가부키에서 유래했다. 여러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가부키에서 장이 바뀔 때마다 막간극을 공연했는데, 17세기 무렵 ‘이치가와 단주로’라는 가부키 배우가 단막극 중에 크게 성공한 18가지 기예(技藝)를 정리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가리켜 가부키 광언(狂言, 재미있는 말) 18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즉, 18가지 기예중에 18번째 기예가 가장 재미있었다고 하여 18번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여기에서 18번이라는 말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장기(長技), 애창곡의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어느 날 식당에 갔더니 종업원이 친절하게도(?) “여기 다대기(다진양념, 우리말) 있으시고요, 고춧가루 여기에 있으시고요” 장황하게 설명한다. 은행에서는 은행원이 거스름돈을 주면서 “2천500원 잔돈 여기 있으세요”.
범국민적 언어순화운동이 필요할 만큼 한글은 지금 갈가리 찢겨져 있다. “주문하신 커피 나오셨습니다”, “이 옷 색상이 예쁘시죠?” 등 사람이 아닌 사물에 존댓말을 붙이는 부적절한 경어가 남발되고 있다. “안돼”를 “안대”로, “뭐하세요”를 “머하세요”로, 쓰는 등의 맞춤법 파괴 현상도 심각하다.
이 밖에도 한글에 상처를 내고 한글을 아프게 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무분별한 외래어, 외국어의 남용이다. 여기에는 영어가 주류를 이루어 ‘스푼’, ‘키’ 등의 일상용어는 말할 필요도 없고 ‘어젠다’, ‘버블세븐지역’, ‘클러스트’ 같은 외래어가 거리낌 없이 사용되고 있다.
사람이 언어를 만들었지만, 그 언어를 장기간 사용하는 과정에서 거꾸로 언어가 사람을 만들어간다. 사람은 언어를 통하여 사고하고 행동하며 이 사고와 행동이 축적되어 문화를 형성한다. 한글을 더 이상 오염시키지 않는 것이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에 대한 우리의 도리일 게다.
우리말과 글 사랑은 국어학자에게 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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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장애인복지신문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