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원영정’(元永貞) 없는 대한민국 정치

‘원영정’(元永貞) 없는 대한민국 정치

박혁종 / 본지 대표

‘역경(易經)’의 64괘 중 여덟 번째 괘(卦)인 비괘(否卦)에는 왕을 보필하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원영정(元永貞)이다. ‘원(元)’은 크다는 뜻이다. 사람이 크고 작은 것은 책임감에서 비롯되므로 큰 사람이라는 것은 그가 얼마나 책임감을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되고, ‘영(永)’은 변하지 않고 오래가는 것이므로. 오래도록 지속하면 허물이 없다고 비괘는 설명하고 있다. ‘정(貞)’은 올바른 원칙이다. 이익 앞에 의(義)를 저버리는 세태에서 이는 인물을 판단하는 중요한 포인트라는 것이다.
6·13지방선거가 30여 일 앞으로 승리를 위한 여야의 주도권 다툼이 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사람을 잘 골라야 하겠다.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새 세상을 열겠네, 백성을 위하네 하지만 철저히 제 이익을 노릴 뿐, 민생문제는 뒤로 제쳐두고 밥그릇 싸움만 하고 있으니 이런 사람들을 한 입으로 두 말을 해 대는 양설거사(兩舌居士)라고 했던가? 돈 좀 벌고 권력을 좀 쥐었다 하면 사람을 경시하는 요즘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교훈이 아닌가 싶다.
지금 여·야는 드루킹 댓글 사건과 남북정상회담 국회비준 등 책임과 원칙을 져버린 국민에 대한 의를 잃어만 가고 있다. 여기에 더해 지난 2월 초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항소심 재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나자 이 재판을 맡았던 정형식 부장판사를 파면하라는 국민청원 인원이 20만 명을 넘어섰고, 청와대가 관련 내용을 법원에 전달했다는 늦은 보도에 삼권분립을 위협했다는 논란이다.
행정부인 청와대가 사법부인 대법원에 법관 인사에 관련된 내용을 전달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물론 청와대는 청원에 대해 공식답변을 할 때 “법원 행정처에 전달하겠다고 투명하게 밝혔던 내용”이라고 해명했고, 또 “문서나 이메일 등은 부담이 될 수 있어 전화통화만 한 것”이고 통화를 하면서도 “어찌하라는 내용은 절대 아니다”라고 전했다고 해명했다.
그런데 “어찌하라고 한건 아니다”라는 이 말은 반대로 더 하라고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특히 청와대는 공식 답변을 할 때 “국민의 뜻은 결코 가볍지 않다”라고 하면서 정혜승 청와대 뉴미디어비서관은 “청원을 통해 드러난 국민의 뜻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모든 국가권력 기관들이 그 뜻을 더욱 경청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라는 말은 법관을 파면하라는 청원을 법원이 경청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들린다.
당장 법조계에선 사법부 독립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며 반발하고 있는 가운데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법원에게 전달한다는 것 자체가 결국 청와대에 이런 진정이 왔으니까 당신들이 그걸 신경 써라 하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라는 것이다.
또 대한변호사협회에서도 “개별 사건마다 국민청원이 있다고 해 이를 모두 법원에 전달하면 법원은 여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며 “사법부 독립을 훼손할 우려가 있는 일은 엄격하게 금지되어야 한다” 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법관 인사에 대해서는 헌법에도 명시가 돼 있다. 사법권의 독립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취지일 텐데, 그렇다면 이 청원 자체가 헌법정신과 맞지 않다. 헌법 106조 1항은 ‘법관은 탄핵 또는 금고 이상형의 선고에 의하지 않고는 파면되지 않는다’는 규정을 청와대도 인정한 부분인데 따라서 “판결을 잘못했으니 판사를 파면하라”라는 청원은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법부의 권한을 침범하고 헌법에도 위배되는 청원에 청와대가 공식 답변을 하고, 거기다 대법원에 직접 전화를 걸어 내용을 전달한 것은 적절치 못했다는 비판이다.
대통령이 사법부 수장인 대법원장의 임명권을 갖는 상황에서, 청와대 참모가 법관 파면 내용이 담긴 국민청원을 대법원에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압박이 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 정치적 안목과, 서로의 주장만 앞세운 내부적 갈등이 더 큰 원인일수도 있다. 결국 서로 눈앞의 이익에만 현혹되어 전체를 살피지 못한 결과인 것이다.
만일 석류나무가 화려하게 핀 꽃들만 좋아해서 그 숫자만큼의 열매들을 다 달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태풍에 가지가 부러지고 뿌리까지 뽑힐 일은 뻔하다. 석류나무는 본능적으로 전체적인 균형을 잡을 줄 아는 것이다. 꽃과 나무들이 선지식이다. 봄이 아프다. 이번에야 말로 떨어져 내린 꽃들의 아픔을 깊이 새겨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지는 꽃도 꽃이다. 정치는 소인배가 하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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